[한국근대사] 개화기 한국인의 아시아연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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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근대사] 개화기 한국인의 아시아연대론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 론
2. 아시아연대론의 대두
3. 1890년대의 아시아연대론
4. 아시아연대론의 발전
5. 결 어
본문내용
아시아연대론의 대두
1874년(명치 7) 일본에서는 일부 정객들이 민권의원 설립 건백서를 정부에 제출하고 민선의원 설립에 대한 유세를 시작하면서 자유민권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취지는 국권 확충에 앞서 민권의 확립을 도모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이 운동이 발전되면서 1881년 자유당이라고 하는 정당이 결성되고, 이 당에 소속되었던 일부 당원들에 의해 아시아연대론이 제창되었다 자유민권 좌파는 일본이 열강의 압력하에 고통을 받고 있는 현상을 벗어나기 위해 열강의 침략하에 있는 같은 처지의 아시아 여러 국가들과의 연대를 생각하였다. 반면 정한론자(征韓論者)들은 일본이 기타 아시아 국가들을 정복하고 일본이 맹주가 되는 방식으로서구의 압력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연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도 제기되지 못하고, 그 운동이 관념적인 면으로 흘렀기 때문에 충분히 발전하지 못하였다. 이들의 발상은 구미열강에 비해 일본이 약소국임을 느껴 아시아와의 연대를 이룩함으로써 그 약함을 보충해 보겠다는 것뿐이었다. 한편 이들에 의해 1880년 3월 동경에서 흥아회(興亞會)라는 단체가 결성되었다. 그런데 이 단체에 소속된 대부분의 회원들은 정부의 관리․군인․언론인들이었고, 한때 천황의 하사금으로 모임의 운영비를 충당하기도 하여 사실상 이 단체는 정부의 어용기관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초창기 주일중국공사 하여장(何如璋)은 처음에 이 단체의 성격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 설립취지에 찬동하여 호의적이었기에 회원들은 몹시 기뻐했다.
1880년 8월 한국의 수신사 김홍집 일행이 일본을 방문하자 흥아회에서는 서한을 보내 김홍집에게 참석을 권유했고, 이에 대해 김홍집은 ‘중국공사도 회원으로 참석하고 있을 정도이니, 아시아인 누군들 그 취지를 듣고 기꺼이 참가하지 않겠는가’하고 크게 호응하였다. 그리하여 일행 중 이조연(李祖淵)․윤웅렬(尹雄烈)․강위(姜瑋) 세 사람을 참석시켰고, 일본인 회원들이 그들을 대접함이 융숭하였기에 김홍집은 귀국하여 국왕에게 흥아회에 대해 호의적으로 보고하였다. 이처럼 김홍집 등 수신사 일행은 흥아회의 의도나 회원의 실체에 대해 따져보지 않고, 단지 동양 3국이 합치기만 하면 유럽인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는 순진한 생각에서 호응하였다. 이와는 달리 중국측은 곧 일본인들의 의도하는 바를 간파하고 흥아회와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중국의 언론인 왕도(王韜)는 ‘제흥아회의두기폐론(題興亞會宜杜其弊論)’이란 논설에서 ‘일본인이 까닭도 없이 대만을 공격하고 유구를 삼킨 것을 보면 도무지 흥아회의 주장을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 반면 한국인들은 순진하게도 흥아회의 취지를 믿고 일본을 방문하면 흥아회 모임에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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