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국제적 긴장의 완화(1953~1962)
* 53년초 아이젠하워대통령 ~ 62년말 쿠바미사일 위기 때까지 국제관계의 시대적 특징
1)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vs. 소련공산당 제1서기 흐루시초프의 관계개선 의지 증대
2) 미·소 공식, 비공식 접촉 증대
3) 독일문제 및 핵무기 경쟁에 의해 발생된 문제 등 미해결의
3. 무솔리니의 실각과 이탈리아의 항복
북아프리카를 차지한 연합군은 영국 수상 처칠이 유럽의 ‘아랫배’라고 칭한 이탈리아를 다음 공격 타깃으로 하는 것을 원했다. 이는 이탈리아 내부의 사정에 의해 점차 무솔리니 정권에 대한 인기가 떨어지고 있었고, 한편 지중해를 차지하고자 하기 위해서
얄타체제는 바로 평화를 위한 체제였던 것이다. 얄타회담에서 평화를 위한 방법으로 여러 가지 합의를 이끌어 내었고, 이 합의된 내용이 얄타회담이 평화를 위한 체제를 만들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얄타회담은 그들이 처음 생각하였던 평화를 위한 체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그 당시 세 강
얄타회담을 통해 나타난 얄타체제였다. 이를 기초로 미․소 양국의 대립에 의한 냉전체제라는 또 하나의 국제질서가 전후를 지배하게 되었다.
얄타회담에서는 독일문제, 동부유럽문제, 전후의 새로운 국제연합문제, 태평양전쟁과 극동문제 등이 중요한 관심거리들이 논의되었다. 이중 2차 대전
Ⅲ. 얄타회담
(1) 얄타회담의 배경
제2차 세계대전은 1945년에 들어서면서 연합국의 추축국에 대한 승리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였다. 소련군은 이미 1944년 봄에 폴란드를 점령하였고 또한 체코슬로바키아까지 일부를 점령한 상태에서 독일에 진격할 채비를 갖추고 있던 차였다. 얄타회담에 임할 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