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제인 얄타체제가 붕괴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 글에서는 독일의 통일과 2차 대전 이후의 국제질서, 즉 얄타체제의 붕괴와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위에서 언급한 얄타회담에서 이루어진 독일 처리문제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고 독일의 분단과 통일의 의미를 고찰한 후,
독일의 자각한 노동자에게 호소하여 이들 국가의 노동자가 전쟁의 공포와 그 결과에서 인류를 해방한다고 하는 임무를 이해하고 그 전면적이고 단호한 현실적인 정력적인 활동에 의해 우리들이 평화의 대업 즉 근로 피착취 주민대중을 모든 예속과 여러 가지 착취에서 해방한다고 하는 대업을 성공리
얄타회담과 미소관계 - 동부 유럽문제를 중심으로, 김신웅, 역사교육학회 | 역사교육논집 | [1987년]
하였고, 이는 오히려 세계평화보다는 세계의 긴장을 지속시키게 되었다. 이는 바로 얄타회담에서 만들어진 얄타체제가 평화체제가 아닌 바로 강대국을 위한 체제였다.
1. 목적 및 연구방법
본
얄타회담에서 소련의 태평양전쟁 참전문제가 논의 되었고, 그 때부터 소련은 강력한 요구조건을 내세우게 되었다. 한반도의 운명이 결정지어지는 첫 발걸음 이 시작된 것이다.
1) 연합군의 한국 독립 약속
남북분단의 원인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미소 냉전이라는 외적인 요인과 민족 내부의 좌우 이
독일군의 부담이어야 했을, 정복지에 대한 식량과 보급품 공급을 해야하는 위치에 서야했다. 게다가 이탈리아는 독일의 알버트 케슬링 원수의 적대적인 독일군에게 점령당해 추가적인 문제점들을 만들어냈다.
한편 시칠리아 침공 작전에서 연합군은 7월 19일, 처음으로 로마를 폭격했고, 이로부터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