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 얄타회담과 독일의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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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사회과학] 얄타회담과 독일의 통일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Ⅱ. 얄타회담과 독일문제
1. 분할문제의 연기
2. 배상문제 및 공업제거문제의 연기
3. 독일 영토 제한의 연기
4. 프랑스와 4대강국의 독일통제문제
5. 얄타회담과 독일문제의 의의

Ⅲ. 독일의 통일
1. 독일의 분단과정
2. 독일의 통일과정
1) 독일 통일의 내적요인
2) 독일 통일의 외적요인
3. 독일 통일의 의의

Ⅳ. 결론을 대신하여
- 독일 통일과 얄타체제의 붕괴
본문내용
Ⅰ. 들어가며

역사적으로 전후(戰後)에는 새로운 국제질서의 재편이 이루어져 왔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베르사유체제가 단적인 예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 과정에서 세계질서는 또 한번의 전환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는 미․영․소 3국의 수뇌들에 의해 1945년 2월 4일~11일에 이루어진 얄타회담을 통해 나타난 얄타체제였다. 이를 기초로 미․소 양국의 대립에 의한 냉전체제라는 또 하나의 국제질서가 전후를 지배하게 되었다.
얄타회담에서는 독일문제, 동부유럽문제, 전후의 새로운 국제연합문제, 태평양전쟁과 극동문제 등이 중요한 관심거리들이 논의되었다. 이중 2차 대전의 전범과 독일의 처리문제는 그 회담에서 논의된 가장 중대한 문제로 여겨졌는데 그 이유는 당시 유럽에서의 독일 세력의 처리문제, 즉 독일의 분할에 관한 문제, 전후 배상문제 및 독일 내의 공업시설 제거와 관련된 문제, 독일 영토 제한의 문제 그리고 전범 처리문제에 관한 논의 등은 연합국들이 해결해야 할 최대의 현안이었기 때문이었다.
얄타체제와 미․소 대립에 의해 새로이 등장한 국제질서인 냉전체제의 결합으로 인해 독일은 1949년 5월 23일 미․영․프에 의해 서독지역에 독일연방공화국이 탄생하고, 동년 10월 7일 소련의 점령지역에 독일민주공화국이 탄생함으로써 분단의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 소련의 붕괴와 독일 통일 등의 국제 정세의 큰 변화들로 인해 약 45년간
국제질서의 근간이 되었던 얄타체제와 냉전체제는 붕괴되었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체제 붕괴와 1990년 독일의 통일을 마지막으로 얄타체제는 붕괴되기에 이른다. 특히, 독일의 통일은 서독과 동독의 통일에 대한 정책 등의 내적요인과 국제사회의 세력관계 및 주변 국가들의 체제의 변화 등의 외적요인에 기인한다. 이로 인해 중부유럽의 약화를 기초로 하여 유럽, 나아가서 세계적인 질서를 구축하였던 체제인 얄타체제가 붕괴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 글에서는 독일의 통일과 2차 대전 이후의 국제질서, 즉 얄타체제의 붕괴와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위에서 언급한 얄타회담에서 이루어진 독일 처리문제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고 독일의 분단과 통일의 의미를 고찰한 후, 독일 통일이 얄타체제의 붕괴에 미친 영향을 파악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라 하겠다.

Ⅱ. 얄타회담과 독일문제

1. 분할문제의 연기

얄타회담에서 소련 측은 전에 비공식적으로 지지했던 극북부 독일을 하나의 국가로 만들고 오스트리아를 포함하여 남부독일을 또 하나의 국가로 만들며 루르와 자르 지방은 국제관리 하에 두는 분할안을 받아들일 용의를 보인다. 이에 처칠은 독일을 분할하려는 어떠한 공식적인 결정에도 반대하는 주장을 하게 된다. 즉 독일의 분할에 '원칙적으로' 동의하지만 독일문제에 대한 더 이상의 검토가 취해질 때까지는 독일의 분할에 관한 어떠한 구체적인 안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독일이 서명할 항복문서에 독일을 분할할 것이라는 삼국의 의도를 언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루즈벨트는 양국의 의견대립을 중재하고자 독일을 다섯 개 내지 일곱 개 국가로 분할하는 것에 긍정하며 이어서 그 문제를 외상들에게 계획안을 마련해 오도록 했다. 이에 소련 측에서 첫째 분할의 원칙, 둘째 '세부사항을 입안한' 특별위원회의 구성, 셋째 항복문서
참고문헌
김진웅. 「현대미국외교사」, 아세아문화사, 1987.
박성조. 「얄타회담과 독일문제 - 연기의, 정책의 이해를 중심으로」, 1992.
이삼성. 「세계와 미국 - 20세기의 반성과 21세기의 전망」, 2001.
조지프 S. 나이 「 국제분쟁의 이해 - 이론과 역사」, 2002.
한국미국사학회. 「사료로 읽는 미국사 - 궁리미국총서 01」, 2006.
김동철.「오스트리아통일과 독일통일 要因의 比較 分析 (A Comparative Analysis on Determinants of Austrian & German Unification)」, 『崇實大學校 大學院』, 숭실대학교,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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