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왕양명(왕수인)의 생애
중국 명(明)나라의 철학자 정치가. 본명은 수인(守仁). 자는 백안(伯安), 호는 양명(陽明). 저장성〔浙江省〕 태생이다. 18세에 주자학(朱子學)을 배웠으나 의혹을 품고, 시문과 도교 불교 등에 탐닉하다가 후에 유학으로 복귀하였다. 28세에 전시(殿試)에 급제하고, 35세 때 환관
왕수인이 살았던 명대사회는 각종 사회문제가 드러나게 되는데 황실, 환관 등은 정치적 특권을 이용하여, 토지겸병의 추세가 날로 증가하였으며, 당쟁과 관료의 부패, 환관의 전횡, 그리고 재해의 빈발 등으로 국가기강이 파괴되고 있었다. 여기에 백성들에게 많은 세금을 부과하여서, 많은수의 백성들
왕수인의 제창으로 말미암아 육학(陸學)은 진실로 명나라에서 부흥하여 남송보다 더욱 성행하였다. 사람들은 왕수인의 공헌을 말살하지 않고서 당시에 그것을 양명학이라 불렀으며, 또 그를 심학에 있어서 아성(亞聖)의 위치에 올려 육왕심학(陸王心學)이라 부르기도 한다.
2. 왕양명(王陽明)의 등
양명학이었다.
본론
1. 양명학의 형성
주자학은 그 체계가 완비되어 있어 원나라 때부터 수양과 실천을 위주로 할 뿐 이론적인 독창성이 없었다. 그러나 명나라 초기 진헌장(陳獻章)은 독서에 의한 자기수련방법에 대하여 의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독서를 버리고 정좌(靜坐)를 통하여 사색
왕수인이 살았던 명대사회는 각종 사회문제가 드러나게 되는데 황실, 환관 등은 정치적 특권을 이용하여, 토지겸병의 추세가 날로 증가하였으며, 당쟁과 관료의 부패, 환관의 전횡, 그리고 재해의 빈발 등으로 국가기강이 파괴되고 있었다. 여기에 백성들에게 많은 세금을 부과하여서, 많은 수의 백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