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에 대한 반발은 단순히 성리학을 비판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대안을 모색하는 단계로 이어졌는데, 곧 성리학이 아닌 다른 학문을 사회를 이끌어 갈 새로운 이념으로 탐색하게 된 것이다. 이 때 성리학의 대안으로 등장한 새로운 유학 경향이 바로 양명학이었다.
본론
1. 양명학의 형성
주자
양명학에서는 이미 마음에 양지가 있으므로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며, 치양지설을 주장하였다. 셋째 성리학에서는 먼저 알고 이어서 행하여야 한다고 하였는데, 양명학은 알고서 행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면서 알고서 행하지 않는다면 이는 앎이 아니라고 하며 지행합일설을 주장하였다. 이렇듯 주자학
양명학은 성리학의 객관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이론적 탐구보다는 내면의 순수한 도덕성을 확충할 것을 강조한 심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학문은 심즉리로부터 출발하여 지행합일설에 도달하고 마지막으로 치양지설에 의하여 완성되는 인간의 마음에 중심을 둔 사상이다.
지금부터 성리학과
심학을 다스렸다"고 했으니, 이를 볼 때 양명학이 우리나라에서 전해진 것은 1521년이 된다. 이해는 왕수인이 50세로 강서(江西)에 있었는데, 양명연보(陽明年譜)에 의하면 "이해에 선생이 비로소 치양지의 교(敎)를 내어 걸었다"고 했다. 왕수인은 그해에 진구천(陳九川)에게 "양지 두 글자는 참으로 천고
설인 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는데, 소수림왕 2년(372)에 중앙에 태학을 설치하여 관리들에게 유학을 가르쳤으며, 평양천도 이후에는 지방에 경당이 설치되었다.
- 동양 : 왕에 의한 국가 경영 → 통치요원이 중시
- 고대국가형성 → 통치요원육성 → 태학(대학기관)
- 교육의 대상 : 귀족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