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중기인 1135년, 묘청 일파가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김부식이 총사령관이 되어 1년여 만에 진압했다. 이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볼 것인가? 단순한 권력투쟁인가. 아니면 정책대결 끝에 빚어진 무력충돌인가. 단재 신채호가 이 사건을 자주와 사대주의의 갈등으로 파악한 이래, 그렇게 보는 것이
Ⅰ. 고려의 역사
9세기 말엽 신라의 사회모순이 격화되고 중앙집권력이 약화되어 전국 각지에서 호족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다. 호족들은 10세기 초에 이르러 견훤(甄萱)의 후백제와 궁예(弓裔)의 태봉(泰封)으로 통합되어 신라와 함께 후삼국으로 정립했다. 주로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개성
김부식은 강경에 참여하여 임금에게 경전과 역사를 강하는 임무를 맡았다. 김부식은 『주역』을 다섯 번, 『서경』을 두 번 강경하였다.
또한 그는 당시 일반 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쓰던 문체인 화려한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을 경박하다고 비난하고 당․ 송에서 발달한 고문(古文)체의 문장을
묘청에 대해서 모두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묘청은 비록 그 행동이 허망하였으나 그 정신적인 불후의 가치는 김부식류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며 전반적으로 묘청을 옹호하고 있다. 신채호,「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 『동아일보 ; 조선사연구초』, 을유문고, 1925.
해방 후 사학의
역사상 1천년내 제1대사건’이라고 규정하면서 주목받았고, 지금은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으며, 그에 따라 이 사건의 승자와 패자로 구분되는 김부식과 묘청에 대한 평가도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 이 리포트는 12세기 고려의 내․외적 위기상황과 이에 대한 묘청과 김부식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