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에 올라가서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하다가 아군의 공격 소식을 듣고 급히 배에 올라 도망하려 하였으나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순식간에 왜선 26척이 조선수군의 포화와 화시에 격파되고 많은 왜병이 궤멸되었다. 이 싸움이 옥포대첩으로, 그의 최초의 해전으로 기록된다.
2. 거북선의 출동
옥
I. 연구동향
1. 일제강점기 일본측의 연구성향
일제강점기 일제의 어용학자들에 의해 주도된 임진왜란사의 연구는 대부분 대체로 정치사와 관련된 것이거나 전투사에 치우친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연구분야와 주제도 크게 한정되어 있었다. 그들의 의도는 일본인의 우월성을 과장 선전하고 조선인의
지 서양 역사학과 한국 역사학의 흐름을 정리함으로써 민족주의와 실증주의를 포함한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들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다음으로는 이러한 이론적 토대를 바탕으로 본 조의 실증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고, 이를 통해 역사교육에 더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하나의
지 23전 23승을 거둔, 임진왜란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9월 16일. 맑다. 이른 아침에 별망군이 나와서 보고하기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적선들이 명량을 거쳐 우리 배를 향해 들어오고 있다” 고 하였다.
<난중일기> 1597. 9. 16
세계 4대 해전인 명량 해전(鳴梁海戰) 또는 명량 대첩(鳴梁大捷
지자총통, 현자총통, 승자총통등을 발포하여 적들을 괴멸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포격 후 돌진하여 적함을 깨뜨리고 배 위에서 전투를 벌여 일본군을 격퇴하였으며 여러 명의 포로들을 구해내었다. 이날 일본 수군은 큰 배 한 척, 중간 배 일곱 척, 작은 배 여섯 척만이 후방에 있어 도망을 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