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첫승리- 옥포 대첨
1592년 일본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발발되었는데, 일본의 대군이 침입해왔다는 급보가 전라좌수영에 전달된 것은 이틀 뒤였다. 이날은 국기일(國忌日)이었으므로 그는 공무를 보지 않고 있었는데, 해질 무렵 경상우수사 원균(元均) 으로부터 왜선 350여척이 부산 앞바다에 정박중
이순신이 이끌던 조선수군은 鹿島萬戶 鄭運 등 전사자 6명과 부상자 25명을 냈다.
(5) 명량해전
이순신이 통제사에서 물러난 뒤 원균은 三道水軍統制使가 되어 일본 수군과 대전했으나 多大浦․漆川谷에서 대패하여 해상권을 상실하였다. 원균의 패전으로 같은 해 白衣從軍 중인 이순신을 다시
이순신 장군은 그 여세를 몰아 한산도 앞 바다에서 왜적선 59척을 수장하여 버렸다. 이 해전을 일컬어 한산대첩 또는 견내량대첩 이라고 한다. 이 해전은 육지에서 왜적과 크게 싸워 이긴 행주산성 싸움, 진주싸움과 더불어 임진 왜란중의 3대첩으로 된다. 한산대첩이 있은 후 왜적은 바다로 나와 싸울
이순신이라는 또 한 명의 해양영웅을 탄생시키면서 마무리되었다.
Ⅱ. 충무공 이순신 장군 집안 가계도
1. 덕수 이씨
후세에 이순신과 그의 아들 면 . 훈 . 신, 조카 완 등 출중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아산 배암골에 정려를 세웠는데, 이를 덕수이씨 가문에서는 ꡐ5세 7충 2효ꡑ
Ⅰ. 이순신의 출생과 가족관계
이순신 (李舜臣, 자는 여해 汝諧)은 1545년(인종 1) 3월 8일 (양력 4월 28일)* 자시(子時, 밤 11시˜새벽 1시)에 당시의 한성부 건천동(乾川洞)에서 출생하였다. - 건천동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초동 동쪽의 '마른내길' 근방이며, 그가 탄생한 집터는 현재의 인현동 1가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