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화(王化)의 은혜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왕화의 영향은 멀어질수록 희미해지지만, 중화문화가 미치지 않는 화의(化外)의 땅이라 하더라도 왕화의 은혜를 입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지구상의 모든 지역이 중화문화의 세계라고 한다.
왕화사상은 전국시대(戰國時代:BC 5~BC 3세기)로부터 진(
왕화(王化)의 은혜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왕화의 영향은 멀어질수록 희미해지지만, 중화문화가 미치지 않는 화의(化外)의 땅이라 하더라도 왕화의 은혜를 입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지구상의 모든 지역이 중화문화의 세계라고 한다.
왕화사상은 전국시대(戰國時代:BC 5~BC 3세기)로부터 진(
왕화(王華)(1446∼1522)는 자(字)가 덕휘(德輝)이고, 용산공(龍山公)이라 일컬었다. 성화 17년(1481) 진사 일등(第一名)으로 올라서 남경이부상서(南京吏部尙書)의 관직을 맡았다. 그의 조상들은 이와 같이 나아가 벼슬을 하기도 하고, 물러나 학문이나 문예를 즐기기도 하면서 지방의 유명한 유지로 생애를
왕화림원중적죽림당 비착궁전 여귀종사
유자업은 사람 막음에 힘쓰지 않고 반대로 귀신을 방지하려고 마침내 남녀 무당과 채녀 수백명을 데리고 화림원중의 죽림당에 가서 활과 화살을 가지고 귀신과 일을 하였다.
(鬼豈畏射, 眞是妄想!)
귀기외사 진시망상
귀신이 어찌 쏘기를 두려워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