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성 동이 논쟁 역시 임진왜란, 병자호란 양란이후 인간성의 황폐화 현상이 심화됨에 따라 현실타계를 위한 국력배양의식과 더불어 실학사상의 대두는 성리학에도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자연히 인간 이외의 자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기까지 하였고, 인간과 동물의 성이 같은가 다른가의 문제로까
논쟁은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에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수암 권상하(遂庵 權 尙夏, 1641~1721)의 문하에서 제기되어 본격화된다. 그의 문하에는 이른바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로 불리는 8인의 학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남당 한원진과 외암 이간
역학, 잡학 등 국정 운영에 필요한 학문의 발전을 가져왔다. 더불어 서인-남인 연립정권이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했기 때문에 퇴계 이황의 학문과 율곡의 학문이 활발한 교류를 통해 융합되는 면모를 보였다. 이는 후에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의 이론 확립에 큰 영향을 주었던 김창협으로 이어진다.
Ⅰ. 서론
성리학은 중국에서 북송대에 일군의 학자들이 유교에 바탕하여 당시의 사회적 환경에 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관을 탐구하는 과정에 형성-발전하게 되었다. 주렴계, 소강절, 장횡거, 정명도, 정이천 등은 절충과 종합의 방식으로 기존의 유교에 도교, 불교적 요소를 결합하여 하나의 새로
본연지성의 차원에서 말하면 인간과 사물은 모두 동일한 오상을 지닌다고 주장
2) 한원진을 대표하는 이론(異論)
- ‘중용’의 ‘솔정지위도’를 전거로 성과 도가 일치함을 주장
- 성은 곧 재기(載氣)의 리라고하여 ‘재기’
- 자연의 보편적 법칙인 리가 인간의 기질과 결합함으로써만 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