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적 탐구의 절정을 이루었던 중요한 학술 논쟁이라면 四端七情論과 지금 논하려고 하는 人物性同異論에 대한 논쟁으로 규정하여도 이론이 없을 것이다. 이 두 논쟁들은 性理學의 주요개념에 대한 논리적 해석을 주제로 하였기 때문에 가장 의미있는 철학적 주제로 부상할 수 있었고 따라서 그 당시
역학, 잡학 등 국정 운영에 필요한 학문의 발전을 가져왔다. 더불어 서인-남인 연립정권이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했기 때문에 퇴계 이황의 학문과 율곡의 학문이 활발한 교류를 통해 융합되는 면모를 보였다. 이는 후에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의 이론 확립에 큰 영향을 주었던 김창협으로 이어진다.
론동이고>이다. 우암은 다음과 같이 말하여 퇴율의 설이 나누어진 이유를 밝힌다.
“이기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다. 이로 부터 말할 수도 있고 기로부터 말할 수도 있다. 시원으로부터 말할 수도 있고 현상으로 부터 말할 수도 있다. 대개 이기는 혼륜무간渾淪無間하나 이는 스스로 이요
1.1 왜 홍대용인가?
홍대용은 박지원, 박제가와 함께 북학파 성호학파와 대별되며 물성을 중시하며 이러한 물성중시를 근간으로 상수학(象數學))과 경제지학(經濟之學)에 대한 관심을 공유한다.
의 한 사람으로서 북학파의 과학사상과 철학이론의 영역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홍대용은 서구의 과
론(人物性同論)을 낙론이라 하고 다르다고 보는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호론이라고 한다.
18c 이전에도 인성과 물성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본격적인 논의의 시작은 권상하의 문하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권상하는 기호학파의 맥을 계승한 인물이며, 인물성동이 논쟁의 주인공이 되는 이간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