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의 대두이며, 둘째는 예학과 존주론 등으로 표현된 성리학의 경직화 현상이었다. 후자는 특히 전통적인 관념과 질서를 유지하려는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정통의식에 집착하게 되었는데 우암송시열이 이 경향을 대표하는 학자, 정치가라 하겠다.
일반적으로 송시열은 국보 239호로 지정된 초상화
유학 사상이 등장
2> 백호 윤휴(白湖 尹鑴)와 서계 박세당(西溪 朴世堂)의 탈주자적 경전 해석은 집권 세력인 노론의 영수 우암송시열(尤庵 宋時烈)이 격렬하게 비판
(2) 백호 윤휴
1> 주자의 경전 해석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한나라 시기의 주석과 해설을 참조하여 독자적인 입장을 펼침
우암송시열이 사문난적이라 지탄
4> 고대의 실천적 원시유학에 이론적 근거를 두고 왕권 강화를 정치적 목적으로 추구해갔던 남인의 입장과도 관계가 있음
(3) 서계 박세당
1> 『사변록』: 『대학』과 『중용』에 대해 주자의 『사서집주』와 다르게 해석
2> 『색경』: 실천을 강조하는 실용적
사상적 분화로 이어진다. 서울, 경기 지역은 정국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국가 운영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였고, 이는 자연스럽게 경세치학의 비중을 키웠다. 이 와중에 남인, 몰락한 북인, 잔존한 훈구파 등 다양한 정치세력의 합류로 학문의 교류가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는데, 화담학파가 연구하던 소옹(
제기되던 시기이다. 동시에 명의 멸망과 청의 등장이라는 동아시아적 대사건 속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를 어떻게 설명하고 대응해야 하는지 고민해야했다. 때문에 17세기 지식인들의 사상, 그리고 그 근간을 이루고 있는 유학에 대한 연구는 곧 조선후기 사상계의 성격과 연결되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