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후반 조선사회에서 주로 서학의 종교적 측면에 대한 배척을 위하여 형성되었던 위정척사론의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종교적 측면뿐만 아니라 경제적 침탈에 대한 위기의식을 강하게 느끼면서 구체적인 운동의 형태를 띠게 된다. 이러한 위정척사운동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우
Ⅰ. 위정척사운동
1866년 1월 조선조정에서는 천주교도의 처형과 천주교 서적의 소각 및 오가작통법의 강화를 시달하였다. 이해 8월에는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 앞바다에 정박하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가 이 배의 입국경로와 목적을 묻고 퇴거를 요구하였으나 퇴거를 거부하고 양곡을 약탈
Ⅰ. 시대상황
19세기 중엽의 조선 사회는 전통체제가 붕괴되는 과정에서 대외적으로는 서세동점으로 표현되는 서구 열강의 도전과 내부적으로는 홍경래의 난 이후 거듭된 민란으로 봉건적 수탈제도와 신분제도 등의 변혁 요구로 민중의 도전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위정척사운동은
위정척사운동
1. 위정척사운동의 확대
1880년 8월 수신사 김홍집이「조선책략」을 올렸는데, 그 핵심내용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기 위해서는 조선이 ‘친중국(親中國)․결일본(結日本)․연미국(聯美國)’의 정책을 펴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조정과 재야에 파문을 일
Ⅰ. 개요
개항 이후, 대한제국기를 거치면서 우리사회 일각에서는 전통사회에서의 가치와는 다른 반전통적인 신사회를 표방하는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우리는 한말 신학계열 지식인들의 주장 속에서 전시대와 구분되는 몇 가지의 중요한 전환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 지식인들에게 전환적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