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기대가 부풀어 있는 시국에서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가 ‘유신’을 선언하였다. 이 선언으로 비상계엄이 선포되었고 국회의 해산과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그리고 현행 헌법의 일부 기능이 정지되었다. 결국 10월 27일 비상국무회의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대통령 간선, 대통령의 비상대권,
야당을 표방하는 김영삼 - 김대중의 연합세력이 신민당의 지도부로 나섬으로써 국민대중에게 큰 희망을 줌과 동시에 유신정권에게는 심각한 위기의식을 조성했다. 그리고 이 같은 대중의 희망과 유신정권의 위기 속에 1979년 하반기가 시작되었다.
2) YH여공농성사건과 김영삼 총재의 의원직 제명
유신체제
1. 유신체제의 출범
1971년 12월 6일 박정권은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였으며, 12월 27일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을 부여하기 위한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통과시켰다. 1972년 7월 4일 ‘남북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고 정
정치화된 모든 군부는 그들이 ‘국가의 이익’과, 특수하면서도 유일하게 일체감을 갖고 있다는 공통된 신념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명백히 국가 이익에 대한 자의적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생각이 단지 이들의 정치 개입을 촉발하는 동기로써 작용할 뿐만 아니
유신체제로의 이행배경 및 유신헌법의 성립과정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그것은 헌법 일부 조항의 효력 중지 및 비상국무회의 대행, 국회 해산 및 정치화동 금지, 새로운 헌법개정안 공고, 헌법 개정안에 대한 국민투표, 그리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