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을 접해보지못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어려울 수도 또는 쉬울 수도 있는 작품들을 보여주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처럼 피나바우시의 작품은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감정과 상황을 표현하고 있었다. 비디오로 작품을 감상하면서 무언가 모를 감정에 휩싸였고, 내가 느끼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의식 세계, 마지막으로 자아를 실현하는 단계를 상상계로 보았다. 또한 무의식·욕망의 세계에서는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 이론을 바탕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즉, 주체인 다문고가 대상인 브라만의 얼굴을 가지기 위해 중개자를 거치는 것인데, 이것은 일종의 외면적 간접화라고 볼 수 있다.
본고에
의식과잉으로 혹은 전시대적 감상으로 우리의 선대의 것을 모방함으로써 건축문화의 오도(誤導)를 저질러 놓고 있다. (…중략…) 유산은 잘 보전하고 전통은 그 시대의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우리 문화축적에 보탬이 될 것이다. 우리 유산과 과거의 전통에 바탕을 두고 남의 문화의 영향도 자기 본위로
․ 창작하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 설정되었다. 한국 문학을 통해 한국인들의 삶을 이해하는 것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한국인들의 특질이라 할 수 있는 고유한 미의식이라든지,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잘 살린 전통과 관습을 고려하여 문화적 맥락에서의 작품 수용과 창작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문학이 언어의 예술이라 함은 또한 그것이 의사소통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의사소통은 일방적이 아니라 항상 쌍방적이다. 그러므로 문학은 작가의 작품 생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읽기를 통한 반응이 있을 때 비로소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