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의 결성은 6월경 가시화 될 수 있었다.
김대지는 젊은 동지들에게 상해독립운동지사들의 동태와 실정을 알리고 무기와 폭탄 구입 제조의 가능성도 시사하면서 비밀결사단체를 통한 무력혁명의 정당성을 역설하여 그들의 동의를 얻어냈던 것이다. 차후에 김대지의 추천으로 의열단의 단장이 된
조선건국동맹의 여운형, 미국에서의 외교활동 중심의 이승만과 유격대 활동의 김일성과 통일전선운동의 김두봉의 다섯 명의 좌우 정치 지도자들을 살펴보고 좌우의 합작 노력과 1930년대부터 1945년까지 세계정세 속 인물별 사건과 논쟁점들을 고찰 해봤다
이들의 노력을 통해 단지 해방이 세계사의
독립운동가와 유학생들이 규합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위해 조직한 단체로‘동주공제(同舟共濟: 한마음 한뜻으로 같은 배를 타고 피안에 도달하자)’를 표방하면서 동제사를 조직하였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상당한 역할을 수행해오다가, 1922년 7월 신규식의 죽음을 전후한 시기에 해체된 것으로
상이한 결론이 도출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 조는 특히 시비가 엇갈리는 상해시기 임시정부(1919~1932)를 중점으로 그들의 활동과정을 알아보고, 같은 시기 식민지를 겪고 있었던 다른 나라의 독립운동 과정을 비교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다시 돌아볼 기회를 갖고자 한다.
조선국민군단 역시 1916년 농장주의 압력으로 계약을 취소당해 문들 닫는 등 이후 하와의 한인사회는 분열로 치달았다.
1915년 6월 박용만은 중앙총회 부회장 취임 차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취임식을 가졌다. 그러나 그해 7월 테러와 기습으로 하와이 국민회를 완전 장악한 이승만은 박용만에게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