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조선의열단의 성립과 조직
1918년 대한광복회 조직의 붕괴와 3ㆍ1운동의 실패로 인해 더 이상 국내에서의 항일투쟁이 어려워지자 많은 애국지사들은 만주를 비롯하여 중국 혁명의 근거지인 북경, 상해 등지로 망명하여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북경과 상해는 각국의 혁명가들이 망명하여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비록 자주적 입장에 서 있지는 못했으나 개항을 단행했고, 외국과의 교섭을 행해야 했던 민씨정권은 1880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여 대외 통상을 전담하게 하였고, 이와함께 별기군(別技軍)이라는 신식군대를 설치하였다.
1881년에는 청에 영선사(領選使)를
민족주의 운동과 함께 민족해방운동의 한 축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 이 글의 목적은 그 동안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었던 사회주의 운동노선의 김산과 민족의 지도자로 평가 받고 있는 민족주의 운동가 백범김구의 독립운동 노선을 알아보고 그 차이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백범 김구
좌파로 분류되어 많이 묻혀버린 탓에 그를 매우 훌륭한 인물로 높이려는 경향이 있지만, 그러한 입장이 연구의 객관성을 떨어뜨릴 가능성이 있음을 염두해야 한다. 여운형 관련 전기 중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지낸 여연구가 쓴 『나의 아버지 여운형』은 아버지 여운형을 민족지도자로 높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