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초기학당은 국초로부터 16세기 후반의 박순과 이후백에 이르기까지 계속하여 점진적인 변모와 함께 발전을 이루어 왔는데, 이러한 변모와 발전의 가장 최대의 성과는 바로 삼당파이다. 삼당파의 시는 직접적으로는 그들의 스승이었던 박순과 이후백과 연관되어 있으며, 간접적으로는 이전에 이
조선시대에 한자가 창제된 이후에도 문자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즉, 구어는 우리말이었으며 문어는 여전히 한자로 존속하였다. 특히, 상위계층인 사대부들은 한글을 천시하고 한문을 높이 평가하여 한자생활을 꾸준히 계속하였는데, 이들의 이러한 가치관과 문화가 반영된 것이 바로 한문학이
이달(李達), 백광훈(白光勳), 최경창(崔慶昌) 등이 모두 박순으로부터 당을 배워 송대의 사변적이고 주리적인 시풍에서 벗어나 참신하고 창조적이며 인정세태를 주정적으로 다스리는 당시(唐詩)로의 복귀운동을 주도하였다.
3. 삼당시인(三唐詩人)
삼당시인이란, 조선 선조 때의 고죽 최경창, 옥봉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스스로 耕作․耕食한다. 토지소유권은 인정될 수 없는 것인데도 국가가 이를 승인함은 부당하다. 우리는 끝까지 이를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지경이 된 것은 일본인의 소행이다. 조선의 지주도 일본인과 한 무리가 되었다.”(조선총독부『조선의 군중』1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