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동맹을 맺고 명나라를 치자는 의도를 가지고 쓰시마 섬의 요시시게에게 명해 조선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 수호하도록 하게 한다. 하지만 조선정부는 이를 거절했고 그러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교섭을 계속 청하며 제대로 교섭이 일어나지 않으면 침략을 할 수도 있다는 뜻을 보이게 된다. 조선
앞에서 살펴본 조선의 국방태세와 방어실태에서 임진왜란의 초기에는 조선의 참패만 있었을 뿐이다. 이렇게 전쟁 준비가 거의 없는 가운데 일방적인 침략을 당한 조선의 전란 피해는 더욱 컸다.
2) 일 본
임진왜란이 일어날 시기 일본에서는 풍신수길이 전국시대를 끝내고 전국통일이 이뤄낸 상
조선측의 불리한 면만 들춰내어 강조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이중 이케우치 히로시의 연구는 일본측 임진왜란사 연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임진왜란에 대한 통사연구인, 그의 연구가 있은후, 비로소 본격적인 저술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관학자들의 연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사를 일본제국
조선군에게 한숨돌릴 기회를 줌은 물론이고 전략적 요충지에서 벗어나있어 상대적으로 방어가 허술해진 왜군 점령지에 대한반격도 용이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6. 이순신 장군의 역할
일단 기본적인 전술적인 기여라면 왜군이 호남 지방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함으로써 가장 중요한 육상의 곡창지
이순신에게 전달하였으며 이순신은 「․ ․ ․ 신의 몸이 아직 살아 있는 한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문구로 임금을 안정시키고 자신은 더욱 자신의 칼을 갈았다. 이순신은 적선에서 얻은 군량과 전쟁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왜군 역시 적선을 증가시키며 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