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투쟁이 불가능하게 되는 등 전쟁을 둘러싼 제반 여건이 군사적 승리를 보장하기에는 매우 불리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타협할 명분을 찾고자 했던 중국에게 2월에 있었던 미국의 부상포로 즉시 교환제의는 정전협상을 재개할 중대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정전에 대한 요구가 존재하였으나 중국은 원칙을 견지하고 양보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회담 재개를 먼저 제안하지는 않고 미국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계기가 된 것이 바로 2월 22일 클라크의 부상포로에 대한 즉시교환 제의였다. 중국은 먼저 김일성과 펑떠화이에게 이에 대한 답변을
이승만의 정전반대 입장을 우려해서 안전보장 약속을 검토하였다. 5월 25일 정전회담에서는 송환을 원하지 않는 포로는 스웨덴, 스위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인도 등 5개국으로 구서오디는 송환위원회를 통해 포로의 의사를 확인하여 석방한다는 내용을 미국이 제안하였다. 이러한 제안을 중국을
포로는 스웨덴, 스위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인도 5개국으로 구성되는 송환위원회로 인도하고, 그 사이에 쌍방의 대표가 포로와 접촉, 의사를 확인하고, 90일 후 면접을 끝내 120일 후에 석방한다는 것이었다. 이 제안은 말한 것도 없이 미국의 양보로서 중국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다.
정전조건을 전달하였다. 이것은 한반도의 재통일, 중공군의 철수, 북한군의 무장해제, 제3국의 대북한 무기제공 금지, 대한민국의 주권존중이었다. 하지만 이 조건들은 정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이 전쟁을 계속하기를 원하였고, 아니면 최소한 안전을 보장해 달라는 의도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