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을사조약’ 체결의 주역
러일전쟁이 일본 쪽에 유리하게 되자 친러파에서 친일파로 변신하여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주동한 이완용은 그 공으로 의정대신 서리 및 외부대신 서리가 되었다가(1905. 12. 8), '을사보호조약'의 결과 조선의 통감이 된 이토의 추천으로 의정부 참정대신이 되었고(1907. 5. 2
조선 말기 왕실 종친으로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협조했으며 한일합병 이후 일왕으로부터 남작 작위까지 받은 인물이다.
이것은 반민족행위자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는지에 대한 시각의 변화라고 보여진다. 이 두건의 판결변화는 최근에도 친일파 청산에 기준이 변화하는데 따른 것이라 본다.
친일파의 존재양태와 구조적 성격>)라는 학술적인 규정이나 ‘당대의 최고 엘리트나 경제인이 사리사욕을 위해 양심과 지조를 버리고 민족을 배반한 자’라는 대중적인 규정을 받고 있다. 그러나 사실 친일파란 단어처럼 정의하기 어려운 말도 없을 것이다. 매국노라는 의미를 띨 때는 개인의 윤리성
이완용은 명동성당 앞에서 이재명의 칼을 맞고 오른쪽 폐를 관통 당했지만 목숨을 건졌다. 1910년 8월 29일 총리대신으로 정부 전권위원이 되어 일본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선통감부는 조선총독부로 명칭이 변경되고 데라우치가 초대 총독이 되었다. 이완용은 그 공으로 일본 정부에 의해 백
Ⅰ. 개요
중국을 발판으로 세계를 제패하려던 일제는 적을 대량 살상하고 일본군의 소모를 줄이기 위해 중국 만주에서 주로 포로 및 민간인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하였다. 그 실험들은 인권을 철저히 파멸하고 인간을 모르모트처럼 실험 대상화하였다. 그 실험의 대부분은 생명을 살리기 위한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