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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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목차

1> 미국 통에서 친러파·친일파로
2> ‘을사조약’ 체결의 주역
3> 3.1운동이 일어나자 세 차례의 [경고문] 발표
4> 이완용에 대해서
5> 이완용관련 연표
본문내용
2> ‘을사조약’ 체결의 주역
러일전쟁이 일본 쪽에 유리하게 되자 친러파에서 친일파로 변신하여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주동한 이완용은 그 공으로 의정대신 서리 및 외부대신 서리가 되었다가(1905. 12. 8), '을사보호조약'의 결과 조선의 통감이 된 이토의 추천으로 의정부 참정대신이 되었고(1907. 5. 22), 또 이토의 요청에 의해 통감부 농사과 촉탁 조중응을 법부대신, 일진회 고문 송병준을 농상공부대신으로 하고, 임선준(任善準)을 내부대신, 이병무(李秉武)를 군부대신, 이재곤(李載崑)을 학부대신, 고영희(高永喜)를 탁지부대신으로 하는 내각을 조직했다. 그리고 곧이어 의정부를 내각으로 바꾸게 되자 이완용은 내각 총리대신이 되었다.
을사보호조약에 반대하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한편 이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음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한 헤이그 밀사사건이 터지게 되자 일본은 이토로 하여금 고종의 양위를 요구했다. 이완용은 이에 동조하여 양위를 건의했다가 두 번씩이나 거절당했으나 계속 강압하여 결국 황태자에게 양위하게 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격렬한 반대운동이 일어나는 한편 분노한 군중들이 남대문 밖 약현(藥峴)에 있던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질렀다(1907. 7. 20). 가재와 함께 집이 전소하여 이완용의 가족들은 이토의 보호로 몇 달 동안 왜성구락부에 들어 있다가 저동의 전남영위궁(前南寧尉宮)으로 옮겨 살았다. 이 때 불탄 그의 재산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