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비교
ⅰ. 집권 과정
1. 광해군
당시 선조 때 세자 책봉 문제로 임해군과 갈등을 빚었다. 그러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였을 때 국난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피난지 평양에서 세자에 책봉되었다. 선조와 함께 의주로 피난을 가다가 선조는 의주로 향하고 광해군은 평안도 지역으로 출발하
재조명을 하기에 앞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연산군, 광해군에 대하여 언급할 필요가 있으며,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우리는 야사 속 연산군과 계축일기 속 광해군의 모습을 살펴보려한다.
(1) 야사 속 연산군
- 성종이 궐 안에서 몸소 기르던 사슴이 연산군의 옷과 손등을 핥았다. 연산군은 사슴
광해군은 폭군인가?-
지금 광해군을 폭군이라고 하는 역사서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전에 나온 야사 따위에는 폭군으로 묘사되어있다. 광해군과 북인 정권은 왕권의 안정을 이룩하고자 인목 대비를 폐위시키는 등 유교 윤리에 어긋나는 약점을 보여 이를 비판한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으
있다. 먼저 과거에는 광해군을 패륜을 자행했던 폭군으로 보았다. 하지만 오늘날 광해군을 실리추구를 바탕으로 한 중립외교와 민생 안정을 위해 노력한 성군으로 재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럼 과연 광해군은 폭군이 아닌 성군 이였을까? 구체적으로 광해군에 대해 살펴보면서 재조명해 본다.
I. 훈구세력과 사림
1. 서론
16세기 사림정치가 시작되며 붕당정치가 판을 이루기 전에는 공신들과 왕족의 친인척들로 이루어진 이른바 훈구세력이 득세를 하였다. 훈구세력의 특징은, 초기에 왕권과 밀접한 관련을 지으며 왕권강화에 도움을 주었고 중앙집권적 성격이지만 갈수록 권세가 심해져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