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8∼1902)가 대표하는 이상주의적 사회진화론이다. 이들은 비록 사상적으로 일정한 시각을 공유했지만 근대 일본에 끼친 질적인 영향은 서로 달랐다. 예를 들면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은 메이지 사회의 각계층에 스며들어 있던 입신출세, 신분상승, 기업발흥 숭상의 열기를인정하고 강화시켰다.
일본은 조공을 바치지 않는 미개한 국가로 분류되어 중요한 대상으로 인식되지 못했다. 또한 중국이 일본보다 강력한 국력을 자랑했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1868년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근대화를 시작한 일본은 급속한 성장을 보였으며 그를 바탕으로 중국보
정치적 현안과 더불어 교육제도의 차이 등으로 성공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1945년 이후 처음으로 두 나라 역사교과서를 공동 연구했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이 때를 기점으로 두 나라 역사교육 관계자 사이에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가 형성되었고, 그 중 일부는 지금도 한일간 역사대화의 한 축을 형성
서구 열강이 동아시아에 나타나기 시작할 때 그의 사상인 ‘탈아입구’를 바탕으로 근대화를 주장하여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 보다 일본의 근대화를 앞당겼다. 현재 일본 만 엔짜리 지폐에 그의 초상이 그려져 있는 것에서 그가 일본의 근대사에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사상의 축이 민권론에서 국권론으로 이동해 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렇게도 자연스럽게 민권론이 국권론으로 옮겨갈 수 있었던 것인가? 그리고 그가 주장한 국권론은 왜 아시아 지역의 식민지를 확보하는 형태로서 팽창해야만 일본이라는 국가가 공고화될 수 있었는가? 이러한 질문에 답을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