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후는 전과 같은 통치로는 계속 나라를 이끌어가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청조의 지위를 튼튼히 하고 자신의 위신을 세우지 않으면 안되었기에, 1901년부터 유신의 기치를 내걸고 신정을 실시하는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그 변법은 입헌군주제를 지향하였던 강유위의 변법과는 분명한
서제를 유폐시키고 변법파를 체포해 무술변법을 끝내니, 변법자강파의 개혁운동은 백일 천하로 끝나고 만다.
보수파를 피해 강유위(康有爲, 강유위)와 양계초는 일본으로 망명을 가고 이후 수년간 해외를 떠돌아다닌다. 그러다 1905년, 청조는 위기를 체감하고 해외 시찰을 통해 입헌을 추진했다. 강유
전족(纏足)폐지 등의 계몽활동을 벌이는 등으로 사람들을 각성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관료·사대부층의 소수파에 지나지 않았으며 게다가 민중의 지지를 거의 받지 못하였으므로 운동은 점차 고립되어 갔으며, 수구파(守舊派)와 서태후(西太后) 일파의 쿠데타로 불과 100여 일만에 실패로 끝났다.
개혁 강령과 변법 결정
1897년 11월 독일의 자오저우만(膠州灣)을 조차 ⇒ 캉유웨이(康有爲)는 상서를 올려 변법을 주장.
변법파와 광서 황제 접촉.
1897년 변법 결행 작정.
1898년 6월 11일 조서를 내려 국시를 정함.
캉유웨이 ⇒ 총리아문행주(總理衙門行走)에 임명, 상소를 전담, 량치차오 ⇒ 역서국 사
서태후는 서양의 문물만을 받아들이고 한점에 대해서는 찬성을 하였으나, 서양의 정신까지 받아 들이고자 하는 변법 자강 운동에는 반대하여 탄압하였다.
이는 서태후 자신이 당당하게 정치를 손에 쥐었다기 보다는 자신의 정치권력에 대한 명백한 구실이 없었기 때문에 입헌 군주제와 같은 정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