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였지만, 이 역시도 다분히 한국적 자유민주주의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였다. 이에 관하여 조평화와 조성근이 내린 결론은 “자유민주주의의 가면을 쓴 반공주의, 전후 반공이데올로기의 全국민적 내면화 작업에 의한, 지배권력의 항상성을 위한 반공주의”이다.
50년대
<등장배경 : 하나의 혁명이 두 개의 사상을 낳다>
1. 네오콘의 역사적 기원으로서 68혁명
: 네오콘의 대부인 라이오넬 트릴링은 한때 급진주의자였으나 1940년대 스탈린주의와 영합한 진보주의에 실망하여 전향
: 1세대 네오콘들은 자유주의 경향을 띤 지식인들이며, 진보적 성향이 강하였던 뉴
자유를 지나치게 구속하는 행위들은 위그너가 살아온 삶의 방식과 정면으로 대치되기 때문이다. 3개월만에 무너지고만 이 공산주의자들의 실정은 어린 위그너에게 철저한 반공의식을 심어주어, 평생에 걸쳐 그의 사상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⑶ 전환점 : 피혁공장의 화학자에서 물리학자
반공주의 확립이라는 남한통치의 전략을 고려했을 때, 이 시기를 남한 언론 통제를 위한 준비단계로 파악하는 것이 옳다. 이 시기 미군정은 한반도의 국내 상황에 대해 무지의 상태였으며, 통제를 위한 행정·시설적 기반이 부재하였다. 그렇기에 미군정은 한반도의 정치 지형 파악과 언론 통제를 위한
자유 같은 특정한 형태의 개인적, 혹은 집단적 권리를 부여한다는 헌법적 민주주의의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와 같은 민주주의 이념의 발전은 거의 전적으로 서구적 합리성의 발전과 그 맥을 함께 해 왔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체제는 시민 참여와 직접 민주주의 사상이 발전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