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作詩)를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시는 공전절후의 성황을 이루어 오언 및 칠언의 율시와 절구의 형식이 완성되어 성당기에 이백·두보의 2대 시성을 비롯하여 시화일치의 묘미를 보여준 왕유, 전원과 자연을 읊은 맹호연, 정로이별을 읊은 고적·왕창령 등이 나오고, 중당기에는 백거이·원진, 만당기에
받지만 제재(題材)의 확장과 더불어 송대의 시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사상분야에서는 유가의 사상을 존중하고 도교 ·불교를 배격하였으며, 송대 이후의 도학(道學)의 선구자가 되었다. 작품은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40권) 《외집(外集)》(10권) 《유문(遺文)》(1권) 등의 문집에 수록되었다.
등이면서 호탕하고 자유분방한 기질과 모순된 현실의 불만을 해소하고자 하는 사대부적 책임감 사이의 갈등이기도 하다
ㆍ이백의 악부시
- 이백은 근체시/고체시/악부시등을 고루 지었는데 특히 악부시가 뛰어나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대부분 악부시/고체시이다
- 이런 사실은 두보가 근체
민간가요의 정신을 시에 도입한 것에 기인하는데, 그의 한없는 감흥을 자유롭고 분방하게 노래하기에는 율시보다 고시 특히나 악부나 절구의 형식이 잘 맞아 떨어졌을 것이다. (절구도 본래 민간가요로서 전래된 것이다.)
<촉도난 蜀道難>,<고풍 古風>59수,<장진주 將進酒> 등의 17수의 악부시가 전한다.
시 지방의 세력들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환관들이 정권을 잡아 봉건적 수탈을 강화하여 백성들의 등줄을 우려내는 등 왕실의 권한이 제 기능을 발하지 못하는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한편, 안사의 난으로 말미암아 중국 전역이 혼란에 빠지고 기존의 질서가 흔들림에 따라, 기득권을 장악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