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해상왕 장보고는 청해진을 본거지로 해상 물류망을 구축하고 이를 반으로 군인으로 출세했다. 그러나 개인적 성취에 만족하지 않은 장보고는 당시의 시대적 흐름이었던 동북아시아 일대의 해일본 하카다와 중국 적산, 초주, 연수향, 양주, 영파, 광주 등에 신라방, 신라소 등
신라의 해적이 틈을 타서 일본지방에서 중앙으로 상공하는 물건을 약탈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사실들은 청해진을 본거지로 하여 장보고 지휘 아래 무역활동을 하다가, 청해진이 몰락하자 해상 질서도 어지러워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점은 장보고가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완도를 중심으로 남
신라 서남해에 출몰하던 당나라의 해적과 일본 왜구를 모두 소탕하고 서남해 해상권을 장악하여 당나라, 일본, 남방, 서역과 아랍의 여러 나라와 무역을 하여 많은 이익을 취하였으며, 아울러 큰 세력을 이루었다. 이때 신라의 국력이 잠시 회복되었다. 836년 흥덕왕이 죽은 후 왕위 계승 전쟁에서 패퇴
장보고 대사의 행적은 곧 우리나라의 해양경영사의 시작이며 대륙경영사의 시작이며 대륙경영사의 축소판이다. 장보고야말로 우리나라 역사상 바다를 다스리는 자가 세계사를 지배한다는 원리를 몸소 실현한 문자 그대로 ‘해상왕국의 건설자’인 것이다. 따라서 장보고 연구는 우리 뿌리에 관한 연
신라와 당을 이어주는 해상교통로의 요충이며 일본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목이기도 했다. 따라서 동아시아 삼국간의 무역을 통하여 크게 성장한 장보고세력이 가장 좋아할 근거가 될 수 있는 지역이었다. 특히 산동반도는 고구려 유민 이정기 일가의 번진이 55년간이나 군림했던 매우 이질적인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