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농노제’라 불리는 이러한 현상은 동유럽 사회가 근대화를 이루는데 있어 서유럽 사회보다 뒤처지는 상황을 야기했고, 서유럽 사회는 무역이라는 형태를 통하여 동유럽의 식량과 주요 원료를 공급받음으로써 보다 발전할 수 있었다. 본 발표문에서는 서유럽과 동유럽의 운명이 갈라지는 분기점
계급의 장원반동은 17세기 절대주의 국가의 확립에도 앞서는 16세기의 재판농노제‘구츠헤어샤프트’ 구츠헤어샤프트(Gutsherrschaft) : 농민의 인신적 예속에 기초한 동부 독일의 영주제. 페리 앤더슨, 김현일외 역, 『절대주의 국가의 계보』, 1997, p.232.
의 확산을 통해서 많은 농민들을 압도하였다. 생산
계급이 혁명에서 선봉적 역할을 했지만 황제가 폭풍을 가라 앉히기 위해 제시한 양보책으로부터 이익을 얻은 자들은 주로 중산 계급 자유주의자들이었다. 1905년의 10월 선언은 성년 남자의 보통선거, 내각책임,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개인적 자유등과 더불어 진정한 의회 정부를 약속했었
화폐지대로 바뀌는 금납화 현상이 일반화됨에 따라서 농민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억압의 세포단위는 크게 약화되어 해체의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이러한 발전의 결말은 ‘자유노동’과 ‘임금계약’이었다). 따라서 봉건 영주들의 계급적 힘은 농노제가 점차 사라져감에 따라서 곧바로 위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