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에 결정적이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봉건제 내에서 국가 상호간의 작용은 경제적인 차원이 아니라 항상 정치적 차원에서 우선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정확히 말해서 봉건제가 경제외적 강제에 기반을 둔 생산양식이기 때문이다. 즉 봉건제에서는 상업이 아니라 정복이 일차적인 팽창
개혁할 수 없고 파괴할 수만 있다는 주장이 마르크스의 주요 논지였지만, 당시의 자본주의는 개혁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가 살아 있던 동안에 영국과 독일 두 나라에서 많은 개혁이 이루어졌고, 그 후 끊임없이 중요한 개혁들이 이루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에 대해서 말했던
화폐지대로 바뀌는 금납화 현상이 일반화됨에 따라서 농민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억압의 세포단위는 크게 약화되어 해체의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이러한 발전의 결말은 ‘자유노동’과 ‘임금계약’이었다). 따라서 봉건 영주들의 계급적 힘은 농노제가 점차 사라져감에 따라서 곧바로 위험에
일본 국내에서는 이에 회의적인 반응이 커져가면서 헌법에 의한 호헌운동을 시작으로 민주주의적 개혁을 요구하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이를 ‘大正 데모크라시’라고 한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 후까지 민주주의와 평화를 요수하는 노동자와 농민 등 민중의 투쟁이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