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사는 조선왕조실록이 보관되어 있는 곳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본래 왕실에서는 실록을 4부씩 만들어 궁궐 내의 춘추관과 충주, 성주, 전주 등 네 군데의 사고(史庫)에 보관하도록 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고 전주 사고만 무사했다. 이 때 전주 사고본이 보존된 것만 해도 우리 역사에
전등사는 아담한 정취가 험준하지 않은 산새와 조화를 이루어 단아함과 안정감을 느낄수 있었다. 전등사의 가람 배치는 전형적인 산지가람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대조루를 지나 들어가면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요사가 있고, 서쪽에는 향로전, 약사전, 명부전, 극락암, 적묵당, 종각이 있다.
전등사에 보관하게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화궁주의 옥등 설화보다는 송나라에서 전해진 대장경 때문에 전등사로 개칭되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근거가 있다. 그 대장경 속에는 <경덕전등록> 등의 불전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전등사대조루를 중건할 때의 모연문을 보면 ‘육조의
강화도는 홍익인간의 얼이 새겨있는 참성단, 고구려 때 불교를 전래시킨 근원지인 전등사, 고려 39년간의 도읍지 고려 궁지 등 제단 · 사원 · 왕궁 등 고고학적 문화유산이 집적된 곳이다. 강화도가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불리 울 정도로 그만큼 오랜 역사의 유적과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고, 어느 곳을
Ⅰ. 서론
하점면, 長井里, 華道面 沙器里와 東幕里 등지에서는 구석기 유물이, 군내의 여러 곳에서 신석기 유물이 채집된 바 있어서 강화도에서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하점면 富近里와 新三里 등지에 분포해 있는 고인돌,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쌓았다는 마니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