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임오화변(壬午禍變)에 대한 처리와 정조가 대리청정시기에 핍박 받은 것에 대한 조치가 어떤 형태로든지 매듭을 지어야만 세도를 바로 잡아 왕도 정치를 실현할 수 있었다. 등극 초에 미비한 왕권을 확립시키고 새로운 통치체제를 마련하는 것이 우선시 되어야했는데, 즉위
정치 추구와, 여러 학문을 수용하고 문예부흥을 형성시켰다. 영조시기의 蕩平정치는 시비논쟁의 조정이 주된 목표가 주어지고 군주의 지시를 잘 따르는 인재를 등용하는 것을 주 원칙으로 하였는데, 정조의 탕평정치는 목표를 두고 실력을 원칙으로 하는 학문정치를 추구하였다. 탕평책은 영조가 추진
헛소리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는 것이 우리 붕당정치의 역사이다. 선조 대부터 시작된 붕당정치는 영, 정조 대에 들어서는 그 분파가 다양하게 세분화된다. 사림 정치의 역사는 정조 시대 정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중요한 배경이 되기 때문에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사료된다.
정치적 위협 속에서 목숨을 부지해야 했다. 노론 벽파들이 세자 주위에 내시와 종을 배치해 밤낮으로 엿보고 이리저리 음탐해, 정조는 몇 달씩 옷을 벗지 못하고 잠을 청하거나 새벽닭이 울 때까지 책을 잃었다고 한다. 1764년 2월 영조가 일찍 죽은 맏아들 효장(孝章)세자의 뒤를 이어 종통을 잇게 하였
2. 정조의 탕평정치
숙종조 박세채에 의해 황극탕평론이 주창된 이래 탕평은 정치적인 폐단과 모순을 제거하는 유일한 방안으로 인식되었다. 영조는 당쟁의 피해를 몸소 체험한 군주였기에 그 폐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그는 당쟁 타파에 주력하는 가운데 탕평을 자신의 치세를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