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하는 인현황후)
☞ ↑ 위 내용 관련 자료「살아있는 한국사」. 이덕일. p.184~210
■ 경신환국 - 남인인 허적이 궁중의 기름천막을 쓴 것을 이유로 하여 남인을 축출, 서인등용 이때 남인의 처벌을 두고 남인을 처벌하려는 송시열의 노론과 남인과 화해하려는 윤중의 소론으로 나누어진다.
온건 소론과, 경종을 왕으로 인정조차 하지 않던 강경 노론이었다.
노론의 세력이 주가 되었던 시기에 자신을 보호해줄 세력 없이 경종은 왕위에 등극했다. 그리고 곧 노론의 압력에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였고, 이듬해 왕세제에게 대리청정을 주청하는 노론의 요구에 이마저도 들어주게 된다.
영조 35) 세손에 책봉되었고, 1762년 사도세자가 비극적으로 죽게 되면서 왕위에 오르기까지 험난한 고비를 겪어야 했다. 할아버지영조에게 아버지를 살려 달라고 간청해야만 했던 11살 어린 정조는 아버지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던 당시 붕당정치 속에서 영조 말년 1775년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시
정조의 아버지사도세자의 임오화변(壬午禍變)에 대한 처리와 정조가 대리청정시기에 핍박 받은 것에 대한 조치가 어떤 형태로든지 매듭을 지어야만 세도를 바로 잡아 왕도 정치를 실현할 수 있었다. 등극 초에 미비한 왕권을 확립시키고 새로운 통치체제를 마련하는 것이 우선시 되어야했는데, 즉위
정조는 곧 왕비를 왕대비로 올리면서 어머니 혜빈(惠嬪)을 혜경궁으로 높이는 한편, 효장세자도 진종(眞宗)대왕으로 추숭하고 생부의 존호도 장헌세자로 높였다. 또한 즉위하자마자 본궁을 경희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고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여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그의 즉위를 방해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