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당시 선포된 계엄이 불법이었는지 여부와 중산간 주민들에 대한 무차별 방화나 집단학살극이 있었는지 여부가 쟁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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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제주43항쟁(제주43사건)의 역사적배경제주4.3은 한마디로 미군정 아래에서 한민족이 안고 있는 집약적 모순이 빚어낸 역사적인
제주도 사건 종합보고서’를 보더라도 앞에서 말한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당시 상황을 초기에 파악하고 현명하게 처리하였다면 극소수의 인명피해로 단시일 내에 해결될 수 있었던 단순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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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제주43사건(제주43항쟁)의 역사적 의미
제주4
한다.
이처럼 신체의 자유에 대한 절차적 보장과 관련된 헌법상의 제 원칙과 규정들에 비추어 본다면 제주4R31;3 수형자 명부에서 기록된 사람들은 이른바 폭도라기보다는 오히려 재판을 받을 권리가 희생된 자의 명부라 할 것이다. 아니 국가 공권력의 피해자 명부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제주43사건(제주43항쟁)의 주체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로 본격화된 제주도민중항쟁을 살핌에 있어 소박한 수준이지만 당시의 직업구성을 중심으로 행위주체가 어떻게 조직으로 구성되었는가를 살펴보자.
여기에는 항쟁의 주체들뿐만 아니라 이를 공격하는 진압세력의 조직형태도 추적해 본다.
제주지구 미군사령관으로 브라운 대령(미군 20연대장)을 파견, 제주 현지작전의 최고 지휘관으로 경비대, 해안경비대, 경찰과 미군을 통솔하도록 했다. 브라운 대령은 원인 치유책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진압 일변도로 몰고 갔다. 그는 어떻게 하든지 사태를 진압해서 재선거를 실시하려고 시도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