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말과 1946년 벽두의 찬-반탁운동을 거치면서 좌우 대립은 골육상쟁의 지경이 되었고, ‘찬탁=친소=공산주의자=매국, 반탁=반소=민족주의자=애국’이라는 뚜렷한 정치적 표상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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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제주43항쟁(제주43사건)의 정의
‘4.3’이란 제주도에서 5백여 명
4.3 담론 등에 더 의존하고 있었다.
2세대와 3세대를 포함하는 제주주민의 4.3사건에 대한 기억방식은 의견형, 원인분석형, 사례형, 가해피해론, 희생론, 역사평가형, 과정형, 이념.대립형으로 나뉘었다.
Ⅱ. 제주43사건(제주43항쟁)의 배경
1947년에 들어서면서 미 군정은 철도노조파업, 정판사사
제주도내 3개 선거구 중 북제주 갑․을구 등 2개 선거구가 과반수 미달의 보이콧으로 선거가 무효 처리되었다. 결과적으로 제주도는 남한지역 내의 유일한 5․10 단선 거부 지역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아울러 이 단독선거를 추진해 온 미군정에게는 미국의 동북아정책을 거부한 제주도가 눈 속
제주도에 침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보고했다.
소련이 남한 테러의 전초기지로서 제주도를 채택했고, 소련 요원들이 어려움 없이 제주도에 침투하고 있다는 무초의 발언은 아시아에서 반공 보루를 세우려는 미국의 정책과 배치되는 것이기 때문에 제주도에서 민간인들이 희생되더라도 토벌하지
49년 1월 국무회의에서 ‘제주도 사태를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라’고 지시할 정도로 제주도민들을 공산주의자로 여겼다. 이 때문에 무차별적인 인명살상이 빚어지게 된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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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제주43항쟁(제주43사건)의 요인
1. 좌익의 결성과 활동
해방 직후 전국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