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 9월 10일에 제주도에서도 조직되었고, 인민위원회는 민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자치기구로, 항일경험자들이 주도하였으며, 그 성격에 있어 온건성과 독자성을 지녔다.
제주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제주도의 좌익은 해방 이후 제주도가 도로 승격하기 전까지 미군정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
미군정 자료는 사태의 진상을 파악할 수 있는 객관적 자료로 활용될 수 있지만, 동시에 작성주체가 곧 탄압주체였다는 점은 다른 한편으로 미군정 자료가 진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할 가능성도 가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당시의 정치.사회적 상황을 감안한다면 미군정 측이 4.3에 관한 한 가장 체계적으
미군정과 정부의 테러와 폭력 하에 무참히 짓밟혔다. 그런 모진 폭력과 수난을 견디면서 1년간 항쟁을 추진해 온 제주4·3은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민중항쟁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제주4·3의 배경과 과정들을 통해서 이들의 통일정부를 위한 열망이 얼마나 컸고 비참했는지, 4·3특별법 제정의
항쟁의 주체들뿐만 아니라 이를 공격하는 진압세력의 조직형태도 추적해 본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는 농업에 치중되어 있는 제주도의 사회․경제구조를 조금씩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즉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의 비율이 줄어들면서 상공업 및 공무자유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증가하고 그 결과
당면하는 가장 어렵고 중요한 문제이다. 더구나 한국처럼 구시대의 엘리트들이 공고화 과정을 거의 독점적으로 주도하고 있는 사회의 경우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구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 헌법을 만들고, 선거를 실시하여 민주적 정부를 세우는 일은 몇 달 또는 길어야 일년안에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