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 9월 10일에 제주도에서도 조직되었고, 인민위원회는 민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자치기구로, 항일경험자들이 주도하였으며, 그 성격에 있어 온건성과 독자성을 지녔다.
제주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제주도의 좌익은 해방 이후 제주도가 도로 승격하기 전까지 미군정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
제주4.3 당시 선포된 계엄이 불법이었는지 여부와 중산간 주민들에 대한 무차별 방화나 집단학살극이 있었는지 여부가 쟁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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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제주43항쟁(제주43사건)의 역사적 배경
제주4.3은 한마디로 미군정 아래에서 한민족이 안고 있는 집약적 모순이 빚어낸 역사적인
항쟁이다”는 억압에 대해 도민들이 자발적으로 저항했음을 보여주는 구호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1947년으로 넘어가면서 미군정의 실정과 밀수품 단속을 빙자한 군정경찰의 부정부패 행위는 도민들의 민심을 자극하고 있었고, 끝내 ‘3․1 발포사건’과 ‘3․10 관민총파업’이 발생했다.
Ⅰ. 서론
「레드 헌트」는 학살의 책임당사자로서 서북청년회와 같은 우익 청년단체, 외지 경찰, 군대를 들고, 학살 주범으로서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의 책임을 추궁하였다. 특히 미군정은 4.3 발생 시 통치 주체이자 권력 담당자였고, 또 민간인 대량학살을 가져온 강경진압과 초토화 작전을 주한미
미군정과 정부의 테러와 폭력 하에 무참히 짓밟혔다. 그런 모진 폭력과 수난을 견디면서 1년간 항쟁을 추진해 온 제주4·3은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민중항쟁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제주4·3의 배경과 과정들을 통해서 이들의 통일정부를 위한 열망이 얼마나 컸고 비참했는지, 4·3특별법 제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