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여순사건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
1948년 10월 15일 여수 신원리에 주둔하고 있던 제 14연대는 육군사령부로부터 10월 19일 오후 6시를 기해 1개 대대를 제주도로 출동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남로당 전남도당 소속의 군인들은 월북이냐, 선상반란이냐, 여수봉기냐 세 가지 방안에
여순사건이다. 지금부터 좌, 우익의 대립 속에 죄 없이 죽어간 민간인들의 한이 서린 여순사건을 살펴보고자 한다.
2. 본 론
1) 광복이후 5·10총선거까지 정치상황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항복이 발표되자 여운형, 안재홍 등은 1944년 이미 조직되어 있었던 항일 비밀결사인 건국동맹을 모태로 하여 건
제주도에서 3·1절 기념행사에서 발생한 민간인 사살은 급기야 5·10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무장 항쟁으로 커간다.
또한 이렇게 들어선 단독 정부는 이후 북한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다. 북한에 들어선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반공 노선을 강화해 나가는 등의 모습을 보이고, 이는 곧 북
Ⅰ. 개요
4.3제주 민중항쟁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서는 식민지 조선의 땅에서도 가장 소외되고 가장 낙후하였으면 또한 가장 천대받는 고통과 서러움의 땅이었던 제주도의 특수한 지리적, 역사적 전통을 이해해야만 한다.
해방 이후 제주도의 경제상태는 여전히 심각한 곤란을 겪고 있었다. 예컨대 북
제주에서는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이러한 방사탑을 쌓아 액운을 막는다고 한다.
Ⅰ. 제주 4.3 사건
제주4·3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