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공도 면제받고 유배되었던 사신들도 귀국시키는 공을 세웠다니 외교적인 능력이 탁월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1377년에는 왜에 사신으로 가기도 했는데, 이 역시 앞서 사신으로 갔던 나흥유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오자 친원파들이 그를 추천했던 것이다. 정몽주가 뛰어난 인품과 학식으로 교화
조공도 바쳤으며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여 보급하려고 할 때 한자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중국과의 문물교류도 물론 많이 일어났다. 병자호란 이후 청에 사신을 보내 중국의 문물을 접하고 서적을 구했으며 중국을 통해 서양의 여러 문물을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청의 발달
발해는 영역 확장과 그밖에 여러 대내외적인 요인에 의해 4차례에 걸쳐 천도를 했다고 한다. 발해 도성은 건국과 천도 과정에서 조성되었고, 구국, 중경, 상경, 그리고 동경에 있었다. 그 지역은 무왕 대에 확대된 영역 안에 있었다. 무왕 재위 당시(726)에 당이 흑수말갈 지역에 흑수부를 설치하자 무왕은
춘추전국시대는 기원전 770년 경, 주나라가 건융의 공격을 받아 천도한 뒤부터 기원전 221년 진나라에게 멸망하기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춘추전국시대는 크게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나뉜다. 주나라가 건융의 공격을 받기 전의 주나라를 서주, 건융의 공격을 받은 후의 시기를 동주라고 하는데 동주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