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의 예민함에 더 자세히 기록했을 수도 있지만 당시의 재해가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 사상 면에서 이단 당시 궁중과 백성들 사이에서는 평범한 것이었으나 정암이 추구하는 도학에서는 성리학의 실질적, 제도적 문제(전기)에 뿐만 아니라 철학적, 이론적 논의까지 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이것
성리학으로 무장한 강경파사림으로서 요순시대와 같은 이상정치를 목표로 도학사상을 기반으로 한 유교사회를 건설하려 노력했다. 그는 깊이 있는 수준의 성리학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구체화, 체계화 된 것으로 부족하더라도 실천적 행동으로 나타냄으로써 주자 중심의 성리학적 세계관이 조선 사
중종 5)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당시의 시대적인 추세는 정치적 분위기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전반적인 흐름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성균관 유생들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安塘)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1515년(중종 10) 조지서사지(造
개혁사상은 치국의 도 중에서 왕의 도리를 가장 주요시 여기는 왕도정치였다. 정암은 왕과의 경연에서 항시 군왕의 자세와 마음가짐을 역설하였다. 중종은 이러한 조광조의 진언에 도학정치의 뜻을 이해해나가지만, 그 시대가 가지는 혼란성과 성리학적인 토양의 부족등으로 그의 개혁사상은 뜻을 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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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치사상정치관은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 왕도정치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 구체적 실현방법으로 왕이나 관직에 있는 자들이 몸소 도학을 실천궁행(實踐躬行) 해야 한다고 주장, 이것을 지치주의(至治主義), 도학정치라고 함.
4. 개혁정치
(1) 소격서 혁파 - ‘도교는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