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14. ② [해설] 태조 때의 역분전은 관품이 아니라 충성도나 인품(논공행상)에 따라 지급한 것이고 전시과가 토지를 관품에 따라 차등 지급한 것이다.
15. ④ [해설] 신라 하대 지방호족은 스스로 성주 또는 장군
민생고 문제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고, 또한 서학과 서구적인 자연과학의 도입으로 조선사회는 상당한 충격을 받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조선은 자본주의 근대사회로 나아가려는 정치․경제․사회적 변화가 일게 되었고, 밖으로는 통상을 요구하는 구미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 위협이 높아지
조선농촌사회를 크게 변화시켰다. 조선후기 이래로 가속되어온 농민층의 양극분해는 더욱 진전되어 빈농과 반프롤레타리아를 광범하게 창출시켰다. 한편 지주층은 소작료를 거둬들이는 쌀을 일본에 수출함으로써 새로운 부를 축적하게 되었으며, 농촌에 침투한 화폐경제를 이용하여 농민에 대한 고
민중’을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민중이라는 개념은 한국사의 특수성, 특히 우리가 다루려는 조선후기의 특수한 상황에 비추어 정의해 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흔히 전통시대의 민중이란 피지배층으로 존재하는 광범위한 사회세력을 일컫는다고 할 수 있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정의해 보
사회적 기반을 결여하였을 뿐 아니라 붕당정치의 완전한 파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세도정치의 직접적인 계기는 1762년 (영조 38) 思悼世子의 사사사건을 둘러싼 시파와 벽파의 대립에서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당시 나주 괘서 사건을 계기로 일당전제의 추세를 현저히 한 노론은 영조 25년 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