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금은 명나라와 전면전을 치르기 전에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조선을 굴복시키거나 자신에 우호적인 정권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조선은 여진족인 후금과 전쟁 또는 화친이라는 새로운 관계 정립이 필요한 시기였다. 국사편찬위원회 「국사」
2. 광해군의 중립외교
계속하여 세력을 확
후금을 세웠다. 당시 조선에서는 1623년 서인의 인조반정으로 인해 중립외교를 실시하였던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조선의 대외정책이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는 쪽으로 실시되었다. 후금에서도 조선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해 왔던 홍타이지가 즉위하며 이괄의 난 때 후금에 투항한 한명윤의 아들과 한윤
광해군세력을 몰아내고 새로운 임금을 세운 사건이 인조반정이다. 새로 들어선 인조와 서인세력은 노골적으로 친명배금정책을 시행하게 되고 이에 한순간에 교류국에서 오랑캐로 전락한 후금이 조선을 무력으로 침탈한것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다. 그러나 후금이 이러한 이유만으로 조선에 출병한
조선&후금)를 형제지국에서 군신지의(君臣之義)로 고칠것과 황금,백금 1만냥, 전마(戰馬) 3000필 등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을 요구하였다. 또한 1636년 2월 용골대(龍骨大),마부태(馬夫太)등을 보내어 조선의 신사(臣事)를 강요하였으나, 인조는 후금사신의 접견마저 거절하고 8도에 선전유문(宣戰諭文
병자호란이라는 조선시대 역사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던 이 두 전쟁은 초, 중, 고등학교 시절을 통 털어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많은 20대들이 잘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번 기회를 통해 역사를 바로 알고, 역사를 통해서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고, 현재를 반성, 발전의 기회로 삼을 수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