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다.
그는 어느 유파(流波)에도 속하지 않았다. 이는 문단에 등장하기 전부터 당대 어느 대가(大家)들과도 다른 자기 고유의 영지(領地) 개척을 예술가로서의 유일한 사명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성적이며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창조한 천재였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에는 그 진가를
몰락함과 함께 문인들의 상대적 위치가 약화 되었다. 특히 시대의 중심에 선 부르주아지들의 이데올로기에 순응하기를 거부한 작가들은 자신들이 갈망하는 바와, 현실과의 단절을 절실히 깨달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무력함을 간파한 작가들은 자신이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작품을 개화기 시가의 효시로 보고자 하는 까닭중 하나는 이 작품이 종래 우리 주변의 고전 시가나 시조와는 다른 모양으로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그 다른모양 이라는 것은 신문이라는 근대적 보도매체를 통해 발표된 것을 말한다. 또한 이 작품은 그 의식에 있어서도 고전 시가들과는 다른 점이 있다.
쉽게 알 수 있다. 20세기에 나타난 여러 연극 양식
에 관해서 아직 어느 누구도 융통성 있는 이론을 밝히진 못했지만 한 가지 모든 표현주의 희곡에 공통된 요점은 그것은 매우 엄격한 반사실주의 연극이라는 것이다. 표현주의는 몹시 거친 신낭만주의로 시작되어 변증법적 사실주의로 발전되었다.
작품들은 대륙을 내왕하면서 품었던 조국에 대한 무한한 향수, 아니면 조국에 대한 무한한 향수, 아니면 조국 광복에 대한 애타는 정희(情憘)의 체현(體現)일 것이다.
(김학동, 서강대 교수 - '이육사 의 문학활동' 중에서)
1930(26세) 1월 3일 첫 시(詩) <말>을 조선일보에 발표(이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