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게 된다. 그는 많지 않은 작품을 남겼지만 자신이 활동하던 시대 뿐 아니라 소위 포스트 모더니즘이라 불리우는 오늘날에까지도 계속해서 연구되고 있는 작가로서 낭만주의를 지양하고 문학의 합리적․지성적인 면을 중시하여 형식과 내용의 합일을 추구한 모더니즘의 기수로 평가되고 있다.
문학이 보여주는 지적인 측면과 과도한 형식적 실험성을 강조한 나머지 그가 지나치게 난해한 작가로만 알려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실상 Joyce는 자신을 둘러싼 주위의 모든 대상에 대한 강렬하고도 독특한 애정을 지닌 작가이다. 특히 그는 자신의 조국 아일란드가 처한 현실에 대한 관심을 자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민 대다수가 카톨릭 고도인 애란인들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중 첫 번째 이유인 상스러운 낱말들을 몇 번의 출판사에서의 수정요구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쓴 이유는 바로 그 당시의 Dublin의 사회상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고자 함이었다.
칼리지(Belvedere College) 3학년에 전입, 16세까지 다녔다. 작문으로 자주 상을 받았다.
1896(14세) : 호라티우스(Horatius)의 글을 영역(英譯)했는데, 이는 현존하는 그의 가장 오래된 글이다.
1898(16세) : W.B 예이츠를 중심으로 한 아일랜드 문예운동이 일어나는 시기였으나 조이스는
국토에 대해 강한 애착을 갖고 있다. 딜론 존스톤은 그의 책 『조이스 이후의 아일랜드 사(Irish Poetry After Joyce)』에서 아일랜드 문학 전통 중 가장 일관된 것은 국토의 묘사라고 하면서 고대 아일랜드 문학에서는 땅에 명칭을 붙인다든가 전설을 만들면서 의인화시킨 전통이 있었음을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