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변화라고 하겠다. 결국 앙리 4세는 구교의 호응을 얻어 파리를 점령하였으나 결국에는 신-구교 사이의 혼란을 가중시켜 암살되는 최후를 프랑스 사에서 볼 수 있었다.
리슐리외의 라 로셸 공격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소설 속에서는 그의 연적 버킹엄에 대한 증오로부터 라 로
1. 예견자에서 예언자로 : 모세의 복종 시험
미래는 언제나 의미의 커다란 보고(寶庫)였다. 예언자들의 전설은 인간이 신의 뜻을 미리 해독함으로써 신이 변덕을 부려 희생양이 되었으나 드디어 풀려나 믿음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독립적이고 자의식적 자아를 지향해온 노력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
종교적 당위성과 명분을 제공해 준 것이 종교개혁이다. 종교개혁이후 유럽은 신교인 프로테스탄트와 구교인 가톨릭으로 나뉘어 끊임없는 전쟁 속으로 들어간다. 따라서 본고는 종교전쟁의 중심이었던 독일과 프랑스의 경우를 통해 전개 과정과 이유를 고찰하고자 한다. 또한 종교전쟁의 당사자들이
종교개혁의 교의를 신봉하는 사람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독일 밖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다. 독일의 종교개혁 신봉자들은 복음파(Evangelicals)라는 이름을, 프랑스에서는 위그노파(Huguenots)라는 이름을 선호하였다.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은 루터(1483경~1546)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스위스의 울리
개혁을 지지하던 위그노들 사이의 종교적인 갈등은 시민전쟁 즉 종교전쟁으로 악화된다. 생 바르텔르미의 학살(1572년 8월 24일) 사건은 하룻밤에 파리의 모든 신교도들을 학살했다.
이후, 어머니에 의해 프로테스탄트종교 속에서 키워진 앙리 4세가 1589년 프랑스의 왕이 되었을 때(부르봉왕가의 첫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