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中共軍) 3차 공세시 모택동(毛澤東)(마오쩌둥(모택동))의 정치(政治)적 의도와 팽덕회(펑떠화이)의 군사(軍事)적 목적이 상충될 때 그 관계를 클라우제비츠 전쟁론을 토대로 분석
서론
중공군(中共軍)이 3차 공세시 모택동(毛澤東)과 팽덕회의 의견이 상충한 내용에 대해서 기술하는 것이었다
중공 참전배경
가. 모택동과 장개석의 대결
중일전쟁이 끝난 후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점령지 정리 등을 둘러싸고 공산당과 국민당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오랜 전쟁에 지쳐있던 양측은 내전을 피하기 위해 양측은 협상을 개시했다. 1945년 8월부터 약 한달 반 정도 충칭에서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중공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활동을 했고 북한 건국과정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시기에는 소련공산당의 비호 하에 정권을 확실히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김일성의 초기 활동을 연구함에 있어서 중공과의 연계를 배제하고서는 진행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김일성은 중국에서 성장했으며, 중국에서
제4 차 5개년계회요강을 입안하였다. 중앙이 정식으로 계획회의를 개최해 5개년계획을 제정했다는 것은 경제업무가 다시 중요시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지도사상의 불합리성은 새로운 문제를 야기 시켰다. 회의는 중공 9대의 제국주의전쟁의 불가피성 및 “전쟁은 혁
3. 1·2차 전투 - 중국군의 신중한 공격
10월 25일~11월 4일 중국군과 한국군의 본격적인 1차 전투
중국군은 한국군을 덕천·개천·안주 까지 밀어내는데 성공
11월 8일 미군의 반격. 패전
- 중국군은 미군을 유인해 동서에서 공격하는 전략으로 자만해 있던 미국군에 큰 타격을 입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