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군은 그동안 소극적인 방어위주 전략에서 적극적인 공세로 전환 - 2차 전투
11월 27일~12월 11일 장진호 전투
- 당시중국군 12만 명과 유엔군 2만 명이 맞서 싸워 중국군이 ‘인해전술’을 펼친 대표적인 사례이다.
- 당시 미군들은 “중국군들이 끊임없이 밀려왔으며 중국군의 시체로 진지를 구축
소련인 군사고문들을 통렬히 비판하였다. 스탈린은 군사고문들이 조선인민군 사령부를 합당하게 원조하고 있지 못하다고 하면서 최대한으로 북한 지도부에 동적적인 입장을 취했다. 상황이 변하자, 김일성과 박헌영은 스탈린에게 원조를 요청했고, 특히 중국군의 원조를 구하는 데 스탈린이 영향력을
중국은 10월 2일 참전결정을 내리고 5일 출병의 결의를 채택한다. 그리고 10월 8일 펑화떠이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중국인민지원군이 설립된다. 소련의 몰로또프는 약속한 공군지원을 할 수 없다고 중국 측에 전하고 중국은 잠시 참전을 보류하지만 10월 19일에 마침내 중국군은 압록강을 건너서 전쟁에 가
소련은 한국전쟁이 세계전쟁으로 확대될까 두려워했다. 그것이 한국전쟁에 '제한전'이 처음으로 도입된 이유이다. 맥아더는 전쟁 중해임이 되었었는데, 그 이유는 제한전에 반하는 전술을 쓰려했기 때문이었다. 맥아더는 UN군을 압록강까지 진격시키면서 중국군의 참전을 유발하기도 했었다. 또한 맥
전쟁의 흐름이 변하자, 스탈린은 조선인민군의 지휘와 전술, 그리고 소련인 군사 고문을 비판하며 최대한 북한 지도부에 동정적이었다. 10월 1일 김일성과 박헌영은 스탈린에게 소련의 지원과 중국군의 원조에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는 전보를 보냈고, 이미 이 날 중국인민해방군 출병 요청문을 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