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의 「문예강화(在延安文藝座談會上的講話)」
1. 배경 : 1942년, 연안(延安)
-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로 제2차 국공합작 체결
- 문예의 선전·선동 기능을 이용하여 공산당에 항일전쟁의 대의와 정통성이 있음을 선전.
→ 모택동(毛澤東, 1893-1976)의 「지식인을 대량 흡수하자」(1939.12)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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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해방구 문학의 병존이라는 중국문학의 존재방식의 틀은 해체되고 단일한 통합체계로서 사회주의 문학이라는 큰 틀을 형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그 전 시기와의 단절에 의한 것이 아닌 연속에 의해 이루어 진 것이다. 바로 해방구에서 모택동이 제시한 <연안문예강화>의 내용이
문예대중화논쟁과 민족형식논쟁의 측면
통속적인 구어를 사용, 중국전통의 평서체를 채용함으로써 대중어와 구형식의 이용을 실천하고 있다.
계급적 입장과 정치적 관점
당시 문학을 정치적 도구로 삼고자 했던 정책에 기존 작가들은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다.
조수리의 경우는 정책을 위해
문예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문학예술계의 비판이 생각보다 거세게 나오자 1년 만에 ‘쌍백’을 철회하고 ‘반우파 투쟁’을 전개하여 정부 정책에 불만을 가진 작가들을 비판하고 이들의 작품을 독초(毒草)로 판정하고 폐기하였다.
1966년, 모택동(毛澤東)의 명에 의한 〈五一六通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