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참전에 대비하여 소련에 공군원조를 허락 받고 차근차근 전쟁에 임하게 된다. 북한도 스탈린과 중국에 국제의용군 부대를 원조해 주기를 요청하고 10월 1일에는 중국인민해방군의 출병을 요청한다. 중국은 10월 2일 참전결정을 내리고 5일 출병의 결의를 채택한다. 그리고 10월 8일 펑화떠이를 총
한국전쟁이 참전 결정에 중국이 가장 걱정한 것은 미국의 공군과 원자폭탄이었다. 그러나 마오쩌뚱은 한국전쟁의 참전에 대해 강력한 참전 의지를 나타냈다. 미국의 원자폭탄 공격이 있더라도 투쟁은 계속될 것이라는 의지를 보였다. 마오쩌뚱의 참전에 국민당 세력의 반격, 미군의 공군, 해군 공격,
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수세에 몰린 북한은 소련에 도움을 요청한다. 여기에는 직접적인 소련군의 개입을 기대했다기보다는 소련의 영향력으로 중국군의 원조를 구하는데 목적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스딸린은 슈찌꼬프를 통해 김일성과 박헌영을 격려하며, 중국에 의용군 파견 요청을 약속한다. 요
중국 측은 참전해야 하는가를 둘러싸고 논의가 일어나고 있었다. 미국의 공군력과 원자폭탄에 대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뚱은 중국이 미국과 싸울 수 있으며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전쟁의 흐름이 급격하게 변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소련의 군사적 지원과
김일성의 공산당 장악 :
1945년 해방 이후 소련 중심의 공산국가 창설을 위해 서울에 대다수의 공산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소련의 정책을 배경으로 공산당의 남북분립을 주도적으로 추진할 만한 인물을 등용했는데, 그것이 중국공산당 밑에 조선공작단을 만들어 귀국한 김일성 등의 빨치